1. 프로필
본명은 최홍기로 1947년생으로 77세로 알려져 있지만 호적상으로는 51년생이라고 합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중로 66에서 태어났습니다.
거주지는 경기도 양평과 용산구 한남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경주 최 씨라고 하네요.
175cm, 71kg, B형이라고 합니다.
가족으로 어머니 슬하에 1남1녀가 있다고 하네요. 사촌동생으로 나진기가 있습니다.
나진기 씨 또한 가수라고 합니다.
부산 초량국민학교 (졸업), 대동중학교 (졸업), 서라벌예술고등학교 (졸업)
병역은 공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1968년 "내 사랑으로 데뷔했습니다.
히트곡만 120곡이 넘고 발표 앨범수만 200장 이상이라고 합니다.
자작곡은 800곡 정도라고 하니 대단합니다.
트로트의 황제 가황이라는 별명이 정말 딱인 것 같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유태중 씨와 함께 부산 대동중학교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했다고 하네요.
서라벌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호랑이 그림 화가로 유명한 이목일 (1951년생, 서라벌고 13회 1970년 졸업) 화백은 '그 시절부터 이미 노래 하나는 끝내줬던 인물'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80년대 중반 서라벌고등학교를 다니던 후배들은 선생님들이 과거 나훈아에 대해 뒤쪽에 앉아 조용했고, 나중에 스타가 되어 학교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고 합니다.
많은 히트곡들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곡이라고 합니다.
자작곡 중 다른 가수에게 준 곡도 있으며 이중 "땡벌"이 유명합니다.
강진이 말하길 0번째 은인이라고 합니다. 가수로 데뷔한 이후 확실한 히트곡이 없어서 히트곡이 될 만한 신곡을 찾다가 아내가 땡벌을 이야기했고, 강진 본인이 나훈아를 직접 찾아가서 저에게 이 곡을 주시면 유명한 가수가 되어보겠다고 부탁했는데, 이때 나훈아는 왜 신곡이 아니라 자신의 땡벌을 부르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고 강진은 신곡보다 땡벌이 좋다고 했더니 강진이 부른 노래들을 사무실로 보내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들은 나훈아가 연락해서 직접 강진에게 맞게 멜로디와 가사를 추가하는 편곡까지 해줬다고 합니다. 이 편곡버전의 땡벌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강진의 땡벌이라고 하네요.
나훈아는 강진에게 한 푼도 요구하지 않았고, 작업실에서 한번 직접 불러서 녹음까지 해주며 가이드도 해주었다고 하네요.
2. 남진과 나훈아
1970년대 부터라이벌 구도가 생겼으며 팬덤도 나뉘어 있습니다.
두 살람의 외모부터 남진은 수려, 호방 나훈아는 투박한 이미지로 차이가 났습니다.
나훈아는 부산출신 남진은 전남목포 출신인 것도 한몫한 것 같네요.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남진 콘서트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는 티켓은 발매를 개시하자마자 10초도 안 되어서 매진되어 콘서트 가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하네요.
나훈아는 신곡을 발표하는 텀이 매우 길고,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는 반면에 남진은 가요 프로그램이나 예능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 여담
아버지가 무역선 선원으로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1950년대에 집에 이미 외국에서 사 온 축음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성악가를 목표로 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작곡가 심형섭이 오아시스 레코드의 손진석 사장에게 소개해줬으며, LP판을 무료로 녹음시켜 주겠다고 하면서 대중가요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를 잘했던 그가 의사나 판검사 같은 직업을 갖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1972년 6월 4일, 어느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입원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사이다 병 파편으로 왼쪽 얼굴을 찔려 72 바늘이나 꿰맸고 지금도 그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영화배우 김지미가 나훈아의 재능을보고 예절과 서예 등 다방면에 걸쳐 가르쳤다고 하네요.
덕분에 현재도 나훈아씨는 서예에 능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연인 사이를 유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고 하네요.
나훈아는 후에 "김지미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준 사람"이라 말했고, 김지미도 "진정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남자였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훈아는 김지미와 헤어질 당시 그녀에게 수천만 원의 돈을 주었으며 "여자 혼자 살려면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합니다.
김지미와 이혼 후에 가수 정수경과 동거를 하다 첫째 아들을 얻었고 1983년 연말에 3번째 결혼을 했습니다.
1988년 둘째 딸이 태어났으며, 정수경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1993년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네요.
2007년 아들의 결혼식에 나훈아가 불참한 이후로 둘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고 합니다.
나훈아의 아내 정수경이 2014년 10월 8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으며 결국 조정 절차 거쳐 이혼에 합의하였고 재산분할로 12억을 지급했다고 하네요.
2018년 남북평화 협력기원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때 북한에서 나훈아 참석을 요구했던 것이 나중에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2022년 6월, 나훈아는 콘서트 중에 자기 노래는 다 서정적인데 고모부 처형하고 이복형 암살하고 회의 때 존다고 사람 죽이는 뚱땡이 살인마 앞에서 사랑 노래가 어떻게 나오냐고 김정은을 정면으로 디스 하면서 김정은 옆에 있으면 노래가 아니라 귓방망이 날리는 것밖에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공연료가 부르는 게 값인 단 3명뿐인 가수 중 하나라고 합니다. 다른 두 사람은 조용필, 서태지라고 하네요.
콘서트에서 한 팔만 들면 본인이 작사나 작곡한 노래이며 둘 다 다한 노래는 양팔을 위로 올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 따르면 삼성 일가가 개인적 파티에서의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한 연예인이라고 합니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 끊어라"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스타란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로 저작권료가 월 5,000만~1억 원 정도라고 합니다.
참고로 2위는 쿨이라고 합니다.
2017년 11월, 나훈아 컴백 무대인 "나훈아 Dream 콘서트"가 서울특별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에서 각각 3일씩 열렸다. 결국 서울 콘서트는 3분, 대구와 부산 콘서트는 10분 만에 매진되었고, 예매 당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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